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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 George Winston

2012/01/03 01:03 from 분류없음

아래 글은 YOUTUBE에 올려져 있는 December 영상에 어떤 분이 단 댓글입니다. 
영감이 있는 내용이라 여겨져 여기에도 붙입니다.  

I love George Winston's music & have for over 20 years. It helped me when I helped my mother 16 years ago when she was dying of cancer. He played at the nursing home she was in 4 months before she died. I was so happy we were able to share that moment together, we both loved George's music. And now it's helping me again while helping my only brother during his last few weeks of life, he's dying of cancer also. His music helps to strengthen & calm your inner peace when you need to stay 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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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 대인관계에서의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 최저 생활비 이외는 소유하지 않는다. 
4. 버린 물건 버린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5.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6. 평생 학도로 산다. 
7.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지하지 않는다. 
8. 사건처리에서 반드시 건설적 민주적 절차를 밟는다. 
9. 산하(山河)와 모든 生命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10.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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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가서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내 눈, 내 마음에는 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들어왔었다.
리어카를 끌면서 폐지를 주워 생계를 꾸려가시는 할아버지였다.
독일에 오기 며칠 전에도 그 할아버지를 도로 위를 달리다 보았었다.
다른 날에는 허리를 90도로 구부린 채 리어카를 끌고 계셨었는데, 그 날에는 달랐다.
박스를 한 가득 실어놓은 리어카를 세워 놓고 허리를 쭉 펴고 나무에 손으로 기대어 서서 쉬고 계신 모습이었다.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같은 것이다.

나는 그 할아버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나는 교의학도, 생태신학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디아코니아학은 더 좋다.
내가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내 눈, 내 마음에서 떠오르는 그 할아버지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이렇게 이웃을 바라보도록 만들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마음이 드는 데에는 어떤 논리나 목적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 자체가 목표일 뿐이다.
생태신학은,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과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그 길은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러한 생태적 삶을 많은 사람이 기꺼이 선택하게 될 것이다.
후손과 이웃과 지구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위해서.
그런데 디아코니아학은? 디아코니아적인 삶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선택할까?
그런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은총에 의해 일어나는 게 아닐까?
미로슬라브 볼프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의 책 베풂과 용서에서.
나는 디아코니아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디아코니아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이며, 나에게 열어주실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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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는 구절을 설교 본문으로 삼았다고 하자.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은 그 사실을 단순히 암송해야 할 명제로만 전달한다. 이를 위해서 창조과학계 유에 속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할 수도 있고, 이 세상의 신비를 문학적으로 서술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기만 하면 그 이외의 모든 것도 믿을 수 있다거나, 거꾸로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책망할 수도 있다. 상투적으로 설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창조를 믿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첫째, 기도해야 한다. 둘째, 성경을 읽어야 한다. 셋째, 성령 충만을 받아야한다. 그 이외에도 더 많은 항목을 나열할 수 있다. 이런 요령만 알고 있으면 설교는 어렵지 않다. 설교의 성패는 설교자의 진정성과 말하는 기술에 달려 있을 뿐이다.

 

위와 같은 설교는 성서텍스트의 표면에만 머물러 있는 설교. 말씀의 정곡을 놓치고 변죽만 울리는 설교이다. 이런 방식의 설교에 길들여지면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물론 이런 설교에서도 청중들은 나름으로 은혜를 경험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은혜를 받는 것처럼 포즈를 취한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유혹이다. 청중들의 영적 눈높이에 머무는 시간이 많을수록 설교자의 영성은 퇴보하기 마련이다. 청중들이 경험하는 은혜와는 별도로 설교자만의 영적인 길이 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성서텍스트의 표면에 머물지 말고 그 심층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이는 마치 맑은 물을 마시려면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위 본문을 다시 생각해보시라. 저 문장을 제시한, 그리고 그것을 전승한 사람들의 영적 떨림에 관해서 생각해보시라. 그들은 태초를 생각했다. 우주의 시작이다. 물리학에서는 그것을 빅뱅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대폭발이 일어났다는 말인데, 그것이 일어난 태초는 과연 무엇인가? 그 태초 이전은 또한 무엇인가? 이런 사유에서 우리는 영적 떨림을, 다른 말로 현묘(玄妙)의 어지러움을 경험한다. 개인의 실존적인 차원에서도 이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 각자에게 태초는 난자와 정자가 결합되는 순간일지 모른다. 전혀 다른 두 질료가 하나로 결합해서 배아가 되고, 그것이 자라 인간이 된다. 또한 그 이전의 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지금 필자는 우주물리학과 사람의 생물학적 근원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이 본문을 읽는 청중들로 하여금 본문이 말하는 시원(始原)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영적인 떨림에 이르게 하는 것이 바로 설교라는 뜻이다. 설교자들이 우선 성서기자들의 영적 깊이를 따라가기 위해서 물리학과 생물학, 그리고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이런 통찰과 직관과 사유 없이는 성서텍스트의 그 영적 깊이를 따라갈 수 없다. 이런 과정 전체를 가리켜 해석학이라고 부른다.

 

해석학(Hermeneutik)이라는 단어는 헬라 신화의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는데,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다. 헤르메스는 인간이 모르는 신의 이야기를 인간이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 일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다. 사람들 사이에도 그들이 외국인 관계라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신의 언어는 단순히 외국어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헤르메스와 같은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해석학은 어원적으로 번역, 통역, 해석이라는 세 가지 뜻이 있다. 번역은 주로 문법적인 차원에서 언어를 다루는 것이고, 통역은 일상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면, 해석은 삶의 지평을 새롭게 끌어올리는 것이다. <진리와 방법>을 쓴 가다머(Gadamer)는 이 세 번째 단계의 해석 사건을 가리켜 지평융해라고 했다. 우리 식으로 바꿔 말하면 성서기자들의 영적 떨림이 오늘 우리와 일치해서 새로운 차원의 영적 떨림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오늘 설교 현장에서 이런 영적 떨림이 일어나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라. 그것이 없다면 설교가 상투성에 떨어졌다는 증거이다. 여기서 영적 떨림이라는 단어를 종교적 엑스타시로, 즉 열정적으로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드리면서 경험하는 심리적 황홀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또 어떤 이들은 이를 종교적 경건으로 생각한다. 세련된 방식의 종교행위에 참석했다는 만족감 같은 경험을 말한다. 영적 떨림이 그런 것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차원이 다르다. 그 어떤 존재유비도 불가능한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경험하는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 같은 것이다. 성서기자들은 모두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성서에서 배워야 할 영적 경험도 바로 이것이다. 이런 경험에 이르는 전반적인 과정에서 필수적인 작업이 해석이다. 그러니 해석 없이 어찌 설교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설교가 해석학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설교의 본문인 성서텍스트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는 곧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서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으로 알려진 모세도 사실은 하나님을 직접 본 게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33:22,23) 이 은폐성이 바로 피조물인 인간이 처한 엄정한 영적 실존이다. 여기에 바로 설교자의 영적 실존도 담겨 있다.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으면서 그 하나님을 선포해야 할 설교자의 영적 실존은 참으로 고단하다.

 

이런 상황은 이미 철학자들이 진단한 것과 동일하다. 실존철학은 사람을 피투적인 존재(das geworfenes Sein)라고 했다. 이 세상에 던져졌다는 말은 세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우리는 세상에서 사물을 고체와 액체와 기체라는 범주를 경험한다. 미시의 세계에서는 소립자로 경험할 것이다. 그 이상의 경험은 불가능하다. 고체이면서 동시에 액체인 사물을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 기체이면서 고체인 사물도 마찬가지이다. 직선이면서 곡선인 어떤 것을 우리는 모른다. 이 세상에 주어진 조건으로만 이 세상을 경험하고 산다는 말이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자. 여기 열대어가 들어 있는 어항이 있다. 열대어는 물을 인식할 수 있을까? 아니다. 열대어는 물에 던져졌기 때문에 물을 대상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 안에 그냥 들어 있을 뿐이다. 열대어가 물을 인식하려면 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물고기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 이 세상의 진면목을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이다.

 

위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을 분들도 있을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이지 하나님을 은폐시키는 말씀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 말씀 계시를 철학적 사유로 혼란하게 만들지 말라고 말이다. 이런 주장을 단순히 신학적인 미숙성이라는 말로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인식론적 도구에 의해서도 재단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교정되어야 한다. 계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bstoffenbarung)이다. 하나님과 계시는 나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계시로 존재하고, 계시는 곧 하나님의 존재이다. 이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나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런 신학개념은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역사를 보라. 하나님이 자기를 아직은 완전히 나타내지 않으셨다. 실제로 그는 여전히 숨어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는 분이라고 해야 옳다. 이 사실을 칼 바르트는 정확하게 보았다. 하나님은 변증법적으로 은폐의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며 동시에 계시의 하나님(Deus revelatus)이라고 말이다. 은폐가 완전히 사라지고 계시가 완성되는 때가 곧 종말이다. 종말은 창조의 완성이다. 그 이전까지의 모든 것들은 잠정적이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 종말이 와야만 우리는 얼굴로 얼굴을 보듯이 궁극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계시의 종말론적 성격에 근거해서 C. S 루이스는 <Till We have faces>라는 책에서 먼 훗날이 되어야 우리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석학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와 은폐의 변증법적 맥락으로 들어가는 신학적 노력이다.

 

은폐성 개념을 설교 주제와 연관해서 직접 연관해서 생각해 보자.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이 죄에 빠진 인류를 대신한 죽음이며, 거기에 인류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사실은 아직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연루되어 있다. 첫째, 전지전능과 무소불위의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의 십자가를 요구하셨다는 사실은 아직 완전히 끝난 대답이 아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라면 간단히 말씀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게 아닐까? 둘째, 예수의 십자가는 당시에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의 대상이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3) 십자가는 분명히 하나님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사건이며, 예수의 운명이 실패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구원의 길로 믿는다. 왜 그런가?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만한 실증이 있는가? 아니다. 십자가 구원사건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으며, 따라서 여전히 해석되어야만 한다.

 

십자가와 더불어,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설교 주제는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우리는 그 부활을 하나님이 종말에 일으키실 궁극적 생명의 선취(先取)라고 믿는다.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도 부활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간단히 이렇게 묻자. 부활의 현실성(reality)은 무엇인가? 그것을 실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작동되는 이 물리적 세계에 사는 인간이 그것을 넘어서는 부활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가 궁극적인 생명을 완벽하게 해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영생, 영광스런 삶, 완전한 안식,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이라는 성서 용어들이 있지만, 그것으로 다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기독교의 도그마가 불확실하다거나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토대들이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놓여 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그 실체를 확연하게 드러낼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기독교의 인식론적 과정도 역시 잠정적이며, 따라서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더 나가서 성서의 은폐성이야말로 성서가 탈()은폐의 속성을 지닌 진리(알레테이아)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진리의 탈은폐성에 이르는 작업이 필자가 반복해서 거론한 해석학, 즉 해석의 능력이다.

 

해석의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왕도는 없다. 물론 몇 가지 필요한 공부는 있다. 성서텍스트를 역사 비평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성서 원어와 역사비평 훈련을 받아야 한다.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등, 신학교에서의 공부는 총체적으로 해석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만으로 해석의 능력을 확보하는 건 아니다. 삶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성서 자체가 이런 인문학적 통찰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글머리에서 제시한 창조 전승은 바벨론 포로라는 삶의 자리에서 나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민족이라는 사실과 지금 바벨론 포로라는 기구한 운명에 떨어졌다는 사실의 틈바구니에서 하나님을 창조자로 인식하고 고백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삶과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 우리 강단의 형편은 어떤가? 중층적으로 생명의 신비를 열고 있는 성서텍스트가 설교자의 고유한 신학적 시각에서 해석되는 설교를 별로 찾아보지 못했다. 성서의 영적 깊이로 천착해 들어가는 해석은 없고 단지 포장 기술만 차고 넘친다. 영적인 신탁(神託)은 없고 종교 연설만 횡행한다.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과 욕망을 놀라운 입담으로 자극하고 선동하는 설교자가 강단을 독점하는 실정이다. 설교의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강단과 목회, 2011. 5,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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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독교사상, 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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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리더는 혼자 앞장서는 리더(Leader)가 아니라 표정과 마음을 읽는 리더(Reader)가 되어야 한다.

예전엔 한 명의 강인한 리더가 "날 따르라!"면 고개 수그리고 무조건 따라야 했지만 21세기엔 팔로어들이 리더의 면면을 분석하고 테스트를 한 후에 "저 사람 정도면 따라도 되겠다"며 리더를 선택한다.

또한, 팔로어십과 조금 다르지만 헬퍼십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은 맨 앞에 나서는 리더는 아니지만 리더의 약한 모습을 섬김으로 채우며 리더의 뒷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헬퍼'다.

헬퍼십은 리더십도 아니고 팔로어십도 아닌 또 다른 리더십이다. 일인자의 위치가 아니라 윗사람을 훌륭하게 보좌하고 조직원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리더십을 말한다.

사실 리더는 하루 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 타고난 카리스마가 있다해도 다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팔로어십을 거쳐 헬퍼십을 익힌 후에야 진정한 리더로 자리잡을 수 있다. 헬퍼로서 리더의 곁을 지키면서 전체적인 조직의 흐름, 리더의 심기, 리더에게 필요한 일 등을 충분히 익힌 후에야 후배들을 괴롭히지 않는 리더가 될 수 있다.

리더십이건 팔로어십이건 헬퍼십이건 결국 본질은 '사람'이고 '진심'이다.

진심을 다해서 윗사람을 도와주고 후배들에게 감사하며 다독거리는 마음이 조직을 꽃피운다.

- 유인경, 경향신문 기자, '리더는 Reader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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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수도사 The Monk by the Sea> (1808~1810)

캔버스에 유화, 110×171.5cm, 베를린국립미술관 소장

 

19세기 초 독일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 가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가 그린 그림입니다. 그는 평생 금욕적인 루터교인으로 살면서 자신의 신앙체험과 신앙고백을 그림 속에 쏟아냈다고 하지요.

 

 

이 그림을 마주 대하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수평으로 3분할되어 있는 한 곳에 수직으로 서 있는 한 사람.

이쪽과는 등 돌린 채 저쪽과 마주한 그의 고독의 깊이와 넓이가

마치 화면 가득한 하늘이거나 넘실거리는 검은 바다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의 발 앞은 낭떠러지이고 바다 저쪽은 가늠할 수 없이 깊고 어둡기만 합니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요? 아니, 무슨 상념에 빠져 있는 걸까요?

어떤 무엇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겠지만

이제 그의 영혼은 무엇인가에 깊이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딛고 서 있는 땅은 풀 한 포기 없이 메마른 모래언덕입니다. 거친 황무지.

그의 앞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도록 검푸르게 넘실대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구요. 파도가 세찹니다.

그의 암울하고 어두운 현재를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척박한 땅과 더 이상 내딛을 수 없는 바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서 있는 그의 탄식과 고독이 거칠고 차가운 파도소리처럼 마음을 울립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암울하고 슬프지 않은 것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하늘 때문입니다.

검푸른 바다와 맞닿은 하늘은 어둡고 차가운 기운을 승화시키며

위로 올라갈수록 구름 속의 빛을 예고해 줍니다.

빛으로 열린 하늘. 환하고 높다랗게 정면으로 뚫린 그 하늘은 화면을 압도하며

그가 서 있는 척박한 땅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멀어진 이쪽의 하늘은 가슴 설레게 파랗습니다.

 

땅과 바다, 하늘이 수평으로 분할된 거대한 자연 앞에 홀로 수직인 인간.

그가 바로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 바로 나인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의 표상이겠지요.

누구든 그분 앞에 우리는 단독자로 설 수 밖에 없지요.

그럴 때 이 그림 속 수도사처럼 나 역시 그분의 광활함과 깊음과 높음에 영혼이 사로잡혀

어떤 말도, 어떤 생각도, 근심도, 걱정도, 불안도, 두려움도 다 사라지고

그저 텅 비어 버리겠지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나라는 자아감마저 사라지고 말 때

비로소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분과의 교감이 시작되겠지요.

그분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겠지요.

나는 나 아닌 존재, 그분의 존재가 되는 거지요.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있음이 이것 아닐런지요.

 

누구든 건널 수 없다고 느끼는 좌절된 삶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발버둥쳐야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고 느끼는 한계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 내 문제로부터, 현실로부터 등 돌리고 싶어집니다.

내 몸은 한없이 작아지고 내 맘은 어둡고 암울함으로 파도칩니다.

하늘은 나에게서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뼛속까지 외로워집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은 우리에게 하늘만이 희망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늘이 빛으로 열릴 때, 그 빛이 나를 비춰주고 내 현실을 비춰줄 때

우리 눈이 보이고 우리 영이 열려 내가 선 자리, 갈 자리가 보이게 되겠지요.

우리의 희망은, 나의 도움은 내가 서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거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그림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또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그림을 평면으로만 보자면

내가 딛고 있는 땅과 하늘 사이에는 어두운 골짝이 흐르고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도저히 내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숙명이 가로놓여 있는 거지요. 내 힘으로는 하늘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도사의 탄식이 바로 나의 탄식입니다.

그의 존재론적인 고독이 바로 나의 고독입니다.

가로 놓인 어둠을 지나 하늘로 나아가려면 매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그분의 십자가 없이는 도저히 하늘에 닿을 수 없음을 그림은 알려줍니다.

그분의 수난과 부활의 십자가 사건이 그래서 내 것이 되어야 하겠지요.

나와 뗄 수 없게 상관되는 거겠지요.

 

사순절 동안 이 그림 속 수도사처럼 건널 수 없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나 역시 그분 앞에 오래 서 있으려고 합니다.

내가 사라지고 텅 비어 고독해지고 싶습니다.

그 고독 속에서 십자가 위의 주님을 묵상하며 떨림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아침, 그 설렘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출처 : 대구성서아카데미, 글쓴이 : 하늘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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