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가서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내 눈, 내 마음에는 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들어왔었다.
리어카를 끌면서 폐지를 주워 생계를 꾸려가시는 할아버지였다.
독일에 오기 며칠 전에도 그 할아버지를 도로 위를 달리다 보았었다.
다른 날에는 허리를 90도로 구부린 채 리어카를 끌고 계셨었는데, 그 날에는 달랐다.
박스를 한 가득 실어놓은 리어카를 세워 놓고 허리를 쭉 펴고 나무에 손으로 기대어 서서 쉬고 계신 모습이었다.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같은 것이다.
나는 그 할아버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나는 교의학도, 생태신학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디아코니아학은 더 좋다.
내가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내 눈, 내 마음에서 떠오르는 그 할아버지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이렇게 이웃을 바라보도록 만들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마음이 드는 데에는 어떤 논리나 목적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 자체가 목표일 뿐이다.
생태신학은,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과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그 길은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러한 생태적 삶을 많은 사람이 기꺼이 선택하게 될 것이다.
후손과 이웃과 지구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위해서.
그런데 디아코니아학은? 디아코니아적인 삶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선택할까?
그런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은총에 의해 일어나는 게 아닐까?
미로슬라브 볼프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의 책 베풂과 용서에서.
나는 디아코니아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디아코니아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이며, 나에게 열어주실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