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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ARTICLE 2012/03 | 1 ARTICLE FOUND

  1. 2012/03/06 설교, 김상기 목사님,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삶으로만! (1)

김상기 목사님

2011년 10월 30일, 종교개혁주일, 한민교회 설교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삶으로만!”

미가서 6:1-8, 누가복음 10:25-37

 

기도의 감동이 다하기도 전에, 또 찬양으로 우리를 감동케 하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이런 감동으로 이미 채워졌을 여러분들에게 오늘의 말이 사족이 되지 않기를 또 기도합니다.

종교개혁은 좀 전에 목사님께 말씀하신대로 그러한 직접적인 이유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해서... 그 개혁자들은 무엇을 바꾸려고 했겠습니까? 종교개혁이란 권력 유지를 위한 특정한 종교집단의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교회와 믿음, 예수와 하나님을 해방시키기 위한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싸움의 내용을 우리는 몇 가지 말로 이렇게 요약을 합니다. 솔라 피데, 솔라 그라치아, 솔라 스크립투라, 솔로 크리스토, 솔리 데오 글로리아, 이렇게 다섯 가지 이야기로 정리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총으로만, 오직 성서로만, 오직 그리스도로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이렇게 다섯 가지 말로 요약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교회의 상황에서 유효한지는 물어봐야 합니다. 오히려 교회의 탈사회적이고 반사회적인, 그럼으로써 반기독교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교회의 자기 변명으로 전락하고 말지는 않았는지 하는 것을 물어보아야 할 겁니다. 또한 그러한 위험은 이미 그러한 말들 속에 그것들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아닌지도 따져서 물어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구약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말에 기초해서 오늘 우리의 형편을 되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믿음이란 뿌리이고 결국 삶이다. 실천이란 함이란 그 꽃이요 열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없다면 당연히 열매도 꽃도 있을 수 없고 열매와 꽃이 있을 수 없다면 뿌리 또한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말씀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 본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돌이켜 보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도대체 종교개혁자들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사상을 갖게 했던 바울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돌아 보아야 할 겁니다. 우리는 보통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바울에게서 찾습니다. 물론 바울은 그러한 이야기를 수없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목표하고 있는 것도 과연 그것일까 하는 것은 되돌아 보아야 할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서를 한번 찾아가보면서 천천히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점을 미리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고 성서를 같이 읽어보시면서 말을 하겠습니다. 먼저 가장 많이 인용되는 로마서 10장 9절부터 1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거기에는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 그러나 그 말들을 우리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 비춰서 생각해 본다면, 말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쉽게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장입니다. 예레미야서 3장 22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변절한 자녀들아, 내가 너희의 변절한 마음을 고쳐줄 터이니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이러한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그 다음에 대단히 아름다운 말로 고백을 하며 돌아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께 돌아옵니다. 주님만이 주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언덕에서 드리는 이교 제사가 쓸데없고, 산 위에서 드리는 축제의 제사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주 우리의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옛부터 우리 조상이 애써서 얻은 모든 것을, 그 수치스러운 우상이 삼켜 버렸습니다. 우리 조상이 애써 모은 양 떼와 소 떼와 아들과 딸들을 모두 삼켜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수치를 요로 깔고, 부끄러움을 이불로 덮겠습니다. 우리 조상이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주 우리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에 대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다시 요청을 합니다. 4장 1절입니다. "이스라엘아, 정말로 네가 돌아오려거든, 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싫어하는 그 역겨운 우상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버려라.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여라. 네가 '주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진리와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면, 세계 만민이 나 주를 찬양할 것이고, 나도 그들에게 복을 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말로 고백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진리와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거기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정의롭고 공평하고 진리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을 요구한 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 말은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음을 이 본문들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믿음이란 물론 입으로 시인해서 표현되고 또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게 하는 것일런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걸맞는 삶이 따라가지 않을 때 과연 어떠한 것이 될 수 있는지 이 본문은 우리에게 잘 이해를 해 줍니다. 바울은 물론 의롭게 된다는 것이 무엇 때문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인지 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또 그것에 대해 그의 모든 서신들을 통해서 누차 이야기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부터 24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서도 언제까지나 값없이, 값없는, 값싼 은혜로 다만 우리를 권했던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생명의 자리로 옮기겠다 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라고,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의롭다 라고 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성서는 물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토대가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이 목표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과연 거기에서 자기의 증언을 멈추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듭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하신 사건은 아주 일찍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은 그를 의롭다고 하는 것에 그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 목표는 사도 바울의 목표와 마찬가지로 동일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표를 과연 어디에서 찾을까 라고 하는 점을 한번 돌이켜 본다면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로마서 6장 3절부터 13절까집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맏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는 최종적인 목표를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한다"는 것에서 찾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의롭다라고 하는 것(우리를 의롭게 했다라고 하는 것) 우리를 구원했다 라고 하는 것의 목표를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는 것,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사도 바울은 구체적으로 거기에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우리는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믿음과 의, 구원 이런 모든 것들의 최종적인 목표가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는 것에 있다 라고 한다면 그 말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물어보아야 할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이라고 그는 이야기합니다. 죄에게 다시금 종속하지 말라고, 다시금 죄에 대해서 살지 말라고, 죄에 대해서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여겨진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다시 이러한 말을 덧붙입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이것이 새 생명 가운데서 이것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삶이 아닐까요? 물론 그 말도 우리에게 여전히 비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구체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공감이 되어 있다 라고 한다면, 의의 무리고 우리의 삶을 드리라, 하나님께 드리라고 이야기하는 그 속에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새 생명 가운에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과 의와 구원, 그 모든 것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든 최종적인 목표를 우리가 얻은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그것을 누리면서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에 둔다 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은 과연 어떤 생각에서 그렇게 말을 할까요? 로마서 2장 6절부터 10절 사이입니다. 여기에는 심판날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거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 기준으로 믿음을,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들지 않습니다. 2장 6절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한다고 이야길합니다. 참고 선을 행했는가? 악을 행했는가?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임을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날에 각 사람에게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에게 그렇다면 그가 말한 의와 그가 말한 구원과 그가 말한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겠습니까? 그것들이 무의미하지 않다면, 각 사람이 행한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달려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한다는 것은 그것이 또한 나를 염두에 두고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로 그 때, 그는 각 사람에게 행한대로라고 하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을 믿었느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당신을 믿어서 의로 구원에 이르렀냐고 묻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날 우리에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묻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만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바울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의와 구원 이런 모든 것들이 중요하다면, 바로 그런 날을 대비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거기에서 찾으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여전히 우리의 삶을 뒷전으로 놓고 오직 믿음으로만 이런 말을 되뇌이고 있는 건 아닐지 궁금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출생을 매일 되새기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이미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시작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삶의 자리로 옮겨 놓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믿음은 다한 건 결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믿음의 근거를 예수가 아닌 다른 누구에겐가로 다른 무엇에겐가로 옮기려고 하는 시도들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되새기며 싸워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생일이 있어서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오늘이 있기 때문에 내일을 살기 위해서 생일을 기념하는 것이지, 생일 그 자체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시작은 시작일뿐, 그것이 그 결과로써 드러내는 그 무엇이 없다면, 우리는 늘 생일만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2장 6절 이하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심판날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밖에는 내놓을 것이 없는, 그래서 결국은 악을 행한 사람의 영역에 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지 않을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최후 심판의 비유를 이야기하려 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묻지도 않고, 예수를 아는 지식을 묻는 것도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구원의 확신을 묻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작은 사람들엑 어떻게 했는가 만을 묻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동일시하는 그 사람들, 그 약자들, 그 짖밟힌 사람들에게 네가 어떻게 했는가 만을 물을 뿐, 다른, 일체의 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과 그렇게 다른 걸까요?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바울이 그렇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도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고 하는 말을 되뇌어야 할까요? 무엇 때문에 오늘 여전히 우리 교회는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할까요?

히브리서 6장 1잘부터 3절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그리스도의 초보를 닦지 말라. 완전한 데 나아가라.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려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완전한 데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늘상 그리스도교가 말한 가장 기초적인 것들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른지요? 무엇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인지, 어디가 우리가 이르러야 할 곳인지를 생각해 보지 아니하고 여전히 그것들만 되뇌이며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닐른지요?

종교개혁이란 바로 교회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 위해서,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드릴 수 있도록, 완전한 데로 나아가도록, 그런 것들을 고민할 때에 오늘날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비록 종교개혁자들이 그와 같은 구원론을 내세우고 과거의 권위적인 억압적인 폭력적인 교회로부터 해방을 이끌었다 라고 한다면, 그 구호들이 오늘날 우리를, 우리의 오해 때문일지라도, 우리 교회를 여전히 유아 상태에 머물게 하고 있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출구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결국은 이런 말들 속에서, 이런 삶 가운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가 그러한 쪽으로 옮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니, 어둡습니다.

다시 예레미야 7장을 보시면, 거기에는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이 주님의 성전이다. 이곳이 주님의 성전이다.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라고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라고 하는 말에 속지 말라 라고 하는 말을 예레미야는 그의 청중들에게 권면을 합니다. 교회가 면죄부를 팔아서 건축을 하려고 했다 라고 한다면, 교회가 교인들을 독려해서 몇 천억 짜리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 결국 그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요? "이것은 성전이다. 이것은 성전이다."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교회가 하는 말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한순간의 사실을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거 저를 선택한 것은, 저를 알았던 것은 나의 도를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그에게 믿음을 의로 여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시금 그를 부른 목적을, 그를 알았던 목적을 이렇게 한 마디로 서술합니다. 창세기 18장 19절입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도록 하기 위해 내가 그를 알았고 선택했노라."고. 믿음은 시작일 뿐 그 이상은 결코 아닙니다. 그 다음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결국 헛것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을까요?

아브라함을 부른 목적이 "그의 도를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려고 했던 데 있다"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비록 그런 삶을 살았는지를 우리는 다시 물어봐야 하겠지만, 그 목적이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좀전에 바울의 말을 빌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했던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구약과 신약이 지향하는 목표는 단 하나일 뿐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지켜 살아가는 것이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성서의 대부분은 여기에 모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도록 하려고 합니다.

미가서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괴롭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괴롭게 했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구원한 하나님이, 자기들을 억압으로부터 이끌어 낸 하나님을 자신들을 괴롭히는 자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곳,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건져 냈지만, 그들을 구원의 자리로 이끌어 냈지만,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시행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했지만,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던 것은 아닐까요? 정의를, 공의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괴로움이요, 아픔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은 구원한 상태에 머물고 싶어했고, 그들이 처음 가졌던 믿음의 상태에 머물고 싶어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구원을 (되뇌이고) 의로움을 (...)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여전히 괴로움이요, 짐이요, 아픔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기를 괴롭게 여기는 그들을 위해 그토록 긴 역사를 거쳐 수고를 했을까요?

이스라엘은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요구한 적이 없는 것들은 열심히 합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했던 것들은 찾아서 합니다. 그중에 하나는 바로 제사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려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식까지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와 같은 요구를 한 적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아브라함에게 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선한 것은 정의와 자비와 겸손과 야훼와 동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가 이스라엘에게는 괴로움이요, 아픔이요, 찌르는 것이었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면 바로 그 하나님의 역사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는 그 역사, 오늘도 그 역사는 우리에게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를 찾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요구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의 위로를 넘어서서, 다른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다 라고 한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에게 괴로움일까요?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에게 짐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답을 해야만 할 겁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정의와 공평과 자비와 겸손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짐이 되는지, 우리에게 괴로움이 되는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믿어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어 봐야만 할 겁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를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까를 묻습니다. 그가 묻는, 관심의 촛점이 영생이라고 하는 것에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야기했던 심판날에 있었던 것과 같은 관심사일 것입니다. 율법사가 예수에게 영생을 물을 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대답을 합니다. 두 가지 계명을 그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가서 그렇게 살라고,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라고. 그러나 그렇게 살 의지가 없었는지 그는 예수에게 되묻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들입니다. 예수의 말, 성서의 말, 그 모든 것들을 꼬투리 잡아서 어떻게 하면 그가 요구하는 것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나의 지적인 문제로 전락시키려는 노력들은 아닐까? 살라고 하는 말은 결코 입에 있는 말이 아니며 우리 머릿속에 있는 지식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그도 잘 알고 있었던 탓에 예수에게 다시금 그 문제를 지식의 문제로 되돌려 버리려고 합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관점이 잘못돼 있음을 지적을 합니다. 그것이 비유의 내용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누가 저 사람의 이웃인가를 묻습니다. 지금 권력에 짖밟힌 사람들, 울부짖는 사람들, 쓰러진 사람들, 그들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듣고 어떻게 해야 저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저 사람이 너의 이웃이냐 고 묻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느냐 고 물으면서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하며 살라고 이야기할 때 바로 거기에서 영생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은 주어집니다.

영생은 우리의 입으로 하는 고백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고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의 시작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는 것으로 귀결돼야 합니다. 그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종교개혁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교회가 여전히 하나님의 요구를 짐으로, 괴로움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교회가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우리 교회를 여전히 유아적 상태에 머물게 하고 있는 것, 그것을 철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종교개혁이라는 (것)을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 오늘 우리들 가운데 그러한 상태로 되돌아 가게 하고, 그런 상태에 머물도록 우리를 붙잡는 것인지 우리는 심각하게 되돌아보며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성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말에 있지 않고, 삶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바로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실천이 통합된 삶이라고 하는 것을 성서는 누차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 줍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종교개혁을 이야기한다면,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을 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한 방향으로 우리의 교회를 바꿔 나가야 되지 않을까요? 실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고,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실천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사명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는 살려달라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그에 응하는 행위가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곧 정의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사랑과 그와 같은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그렇게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우리가 스스로를 반성하고 우리를 개혁시켜 가는 저희가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출처 : http://cafe.daum.net/hanminchurch, 해당 설교 영상을 본인이 받아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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